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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Poem)

기생 홍랑의 시 '묏버들 가려 꺾어...', 그리고 고죽 최경창의 답시

기생 홍랑의 시 '묏버들 가려 꺾어...', 그리고 고죽 최경창의 답시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 홍랑 (洪娘)

▲ 위창 오세창의 집에 내려오는 서첩에 실린 홍랑과 최경창의 시 원본 (KBS 역사스페셜 화면 캡처)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노래를 부르지말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답시

▲ 위창 오세창의 집에 내려오는 서첩에 실린 홍랑과 최경창의 시 원본 (KBS 역사스페셜 화면 캡처)

 

2001년 1월 20일에 방송되었던 KBS1 역사스페셜 99회 <기생 홍랑의 지독한 사랑> 편에는 기생 홍랑(洪娘)과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최경창이 기생(관기) 홍랑을 만난 것은 1573년 가을, 북도평사로 발령받아서 함경도 경성에 있을 때로, 최경창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둘은 헤어지게 되었는데, 위의 시들은 그때 두 사람이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주고 받은 시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헤어진 후에 다시 만난 것은 1575년입니다.

최경창이 쓴 짧은 기록에는 그가 "병이 들어 봄부터 겨울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은 홍랑이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최경창과 홍랑은 다시 만나 함께 할 수 있었는데, 이 일로 최경창은 관직을 잃게 되었고, 홍랑은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대비정속(관노비나 공노비를 빼내면서 같은 성, 같은 연령의 사람을 그 자리에 넣고 노비를 빼내는 일)을 하며 관에 속한 기생을 데리고 사는 양반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것을 어겨도 벌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최경창은 송익필과 가깝다는 이유로 당쟁에 휩쓸렸고 국상이라는 당시 상황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참고> 기생은 어전에서 기예를 보이기 때문에 비록 대군이라도 데리고 살 수는 없는 것인데 국법이 해이해져 6품관원도 으레 데리고 살았다. - 명종실록

 

홍랑은 최경창이 죽은 후에 스스로 얼굴을 훼손하며 일부종사를 했고, 그의 무덤에서 3년상을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에는 고죽 최경창이 쓴 시들을 가지고 피난했는데, 이 덕분에 '고죽집'이라는 최경창의 시집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최경창과 홍랑의 사이에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고 하며,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다율리 해주 최씨 선산, 최경창과 부인의 합장묘 아래에 기생 홍랑의 묘가 있다고 합니다.

 

※ 위의 내용은 KBS 역사스페셜 <기생 홍랑의 지독한 사랑>편의 내용을 참고 및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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